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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족집게] 대한민국 개헌史…10번째 개헌은

정치

연합뉴스TV [여의도 족집게] 대한민국 개헌史…10번째 개헌은
  • 송고시간 2018-03-18 09:00:06
[여의도 족집게] 대한민국 개헌史…10번째 개헌은

[명품리포트 맥]

[앵커]

1987년 6월 항쟁의 산물로 탄생한 '87년 체제'는 민주화라는 시대적 가치를 녹여냈다는 정치사적 의미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30년이란 세월의 흐름속에서 87년 체제도 또 다시 정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민주화를 쟁취하기까지 이뤄진 9차례의 개헌.

그 변화의 역사에는 대한민국 질곡의 정치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경희 기자가 여의도 족집게에서 집어봤습니다.

[기자]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은 70년간 9차례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민주화의 열망이 이끌어낸 1987년 마지막 개헌을 제외하곤 주로 집권연장에 활용된 측면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 개헌은 1952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대통령 4년중임제, 간선투표제를 대통령 5년 단임제와 직선투표제로 바꿨는데 직전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 의석을 얻지 못해 간선투표로 당선이 어려워지자 일종의 꼼수를 부린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2년 뒤 집권연장을 위해 또 한차례 개헌을 시도합니다.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

5년 단임제를 명시한 조항 앞에 '초대 대통령은 제외한다'는 문구를 추가했는데 3분의 2에서 1명이 모자라 국회에서 부결됐고 그렇게 끝나는 듯 했지만 '인간 반올림'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집권연장에 성공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후 4선까지했지만 3·15 부정선거가 드러나며 하야하게 됩니다.

대통령제의 한계를 경험한 국회는 3번째 개헌을 추진했고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를 도입하고 대통령 5년중임제, 헌법재판소 설치 등을 명문화했습니다.

처음으로 합법적 절차에 따라 평화롭게 이뤄진 개헌이었지만 이승만 정권 적폐 청산을 갈망하는 국민적 염원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부역자 처벌 여론이 들끓으면서 급기야 학생 시위대가 국회를 점거하기에 이르자 국회는 3·15 부정선거 관련자와 이승만 정권 당시 부정축재자 처벌조항을 담은 4차 개헌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이듬해 5월 육군소장 박정희의 쿠데타와 함께 사문화됐습니다.

<대한뉴스> "우리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해 이 나라를 부흥시켜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이며 혁명과업이 완수되는 대로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의회는 해산됐고 계엄사령관을 형식적 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5번째 개헌안을 만들어 내각제를 대통령 4년 중임제로 환원시켰습니다.

재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은 3선 금지 조항을 없애고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요건도 강화하는 6번째 개헌에 나섰고, 3년 뒤엔 7번째 개헌으로 종신집권 토대를 구축했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권을 대통령이 모두 갖는 것은 물론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연임제한도 없앤 그야말로 제왕적 대통령의 탄생이었는데, 또 다시 국회를 해산시키고 계엄령을 발령한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대한뉴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 행위를 금하고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하거나 발의, 제안, 청원하는 일체 행위를 금하며…"

박정희 시대 이후 찾아오는 듯 했던 서울의 봄은 전두환 신군부의 개헌으로 또 다시 멀어졌습니다.

신군부가 주도한 8차 개헌은 대통령 7년 단임제와 간접선거, 시민의 기본권 부활, 유신헌법 독소조항 삭제가 골자입니다.

국민 기본권 등에선 진일보한 측면이 있었지만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불리는 대통령 간선제는 그대로 유지됐습니다.

<대한뉴스> "95.5%라는 높은 투표율을 보였습니다. 새 시대 제5공화국의 헌법을 확정짓는 일에 이토록 많은 국민이 호응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정치적으로 성숙한 국민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정권초기부터 직선제 개헌을 줄기차게 요구했습니다.

이는 민주화 투쟁으로 번졌고 1987년 6월, 당시 여당이 전두환 대통령과 쿠데타를 주도한 노태우를 대선후보로 지명하자 민심은 폭발했습니다.

결국 여권은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고 9번째 개헌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지막 개헌이었던 9차 개헌은 우리 헌정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국민이 중심이 돼 민주화의 토대를 만들었고 여야 합의로 국회 의결과 국민투표까지 거친 역사적인 개헌이었습니다.

대통령 5년 단임제가 확정됐고 국회해산권과 비상조치권을 폐지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오던 대통령의 권한은 대폭 줄었고 국회 권한은 커졌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이 헌법도 30년이 지난 지금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회가 새로 꾸려질 때마다 현재의 가치관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고, 전직 대통령이 퇴직 후 예외없이 검찰수사를 받는 악습을 끊기 위해서라도 권력 분산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습니다.

<문재인 / 대통령> "1년이 넘도록 개헌을 논의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진척이 없습니다. 이것은 책임 있는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직 대통령들이 '블랙홀이 될 수 있다'며 꺼렸던 과거와 달리 문재인 대통령이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어느 때보다 활발한 개헌논의가 이뤄지고 있지만 성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권력자가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또는, 그런 상황을 견제하기 위해 추진됐던 개헌이라면 10번째 개헌은 국민에 의한 권력이양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이후 이뤄지는 첫 개헌입니다.

성사된다면 민주주의를 넘어 보다 성숙한 선진사회로 향하는 대한민국의 출발점으로 지난 9번의 개헌과는 또 다른 의미로 역사에 기록될 전망입니다.

지금까지 '여의도 족집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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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