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TV 디지털이슈팀 [현생탐구] 시리즈 - 실내 클라이밍 편평일 저녁 6시, 서울 종로구의 한 실내 클라이밍장.
무지개색 홀드로 채워진 벽 앞에 클라이밍 3년 차 이강욱(32) 씨가 섰습니다. 팔을 뻗었다 접기를 반복하고, 늘어뜨린 손을 다시 뻗어 올리기를 수차례.
마침내 이 씨는 마지막 '탑 홀드'를 움켜쥐었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암벽에서 내려온 이 씨는 취재진을 바라보며 "정말 도파민이 머리까지 오르는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클라이밍의 매력은 육체적 고통 끝에 오는 성취감입니다. "20번, 30번 시도하다 보면 고통스럽지만, 그걸 참고 뭔가 깼을 때의 도파민은 다른 성취감과는 결이 다르다"고 이 씨는 설명했습니다.
퇴근 후 헬스장 대신 클라이밍장을 찾는 2030세대가 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클라이밍' 해시태그가 붙은 게시물만 236만 건이 넘습니다. 취재진이 방문한 이곳도 평일 35명, 주말 80명 정도가 찾아옵니다. 클라이밍 암장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 '저그재그'에 따르면 전국에 500여 개의 암장이 있고, 이 중 247곳이 수도권에 몰려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실내 클라이밍장 전경. [사진=연합뉴스TV]◇ 내 노력 들여 완등 쾌감 '짜릿'…2030이 클라이밍 찾는 이유?
실내 클라이밍의 대표 종목인 '볼더링'은 정해진 색상의 홀드만 잡고 정상까지 오르는 스포츠입니다. 홀드는 벽면에 볼트로 고정된 돌기 형태의 손잡이로, 색깔마다 서로 다른 경로와 난이도가 지정돼 있습니다. 클라이밍장에서는 이 경로를 '문제'라고 부르는데, 색깔만 보면 실력이 어디까지 왔는지 한눈에 드러납니다.
대학 동아리를 통해 6개월 전 클라이밍에 입문한 신지호(23) 씨는 클라이밍에서 얻는 성취감을 "대체 불가능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신 씨는 "숏폼이나 릴스는 입력하는 노력 없이 보는 것에 불과하지만, 클라이밍은 내가 직접 노력을 들여 한 단계씩 게임을 깨듯 성과를 즉시 체감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곳곳에서 여성 클라이머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이윤서(32) 씨는 여동생 이현서(29) 씨와 나란히 앉아, 다른 이들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3년 전 클라이밍을 시작했다는 이윤서 씨는 "달리기는 좀 오래 해야 카타르시스가 나오는 편인데, 클라이밍은 '내가 해냈다'라는 생각이 좀 빨리빨리 돌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클라이밍의 특성상 노력과 보상 사이의 거리가 짧다는 점, 이것이 즉각적 성취감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클라이밍 일일 체험을 하고 있는 석승현 인턴기자 [사진=연합뉴스TV]◇ 손끝 떨리고 미끄러지기 수차례…대학생 인턴기자의 '인생 첫 클라이밍'
"처음 오신 분들 중에는 다음 날 젓가락질도 못 하시는 경우도 있어요."
일일 강습을 맡은 한승원(32) 강사의 경고가 현실이 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호기롭게 벽을 올랐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손끝과 발끝만으로 체중을 지탱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암벽 중턱까지 올랐다가 미끄러져 떨어지는 순간에는 '괜히 배워보겠다고 했나'하는 후회가 스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손가락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상황에서도 마지막 홀드를 잡고 첫 완등에 성공하자 앞서 만난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던 그 '도파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통증마저 잊은 채 한동안 암벽에 매달렸지만, 체험 직후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 펜을 쥔 손끝은 여전히 떨려왔습니다.
이강욱(32) 씨가 자신이 구매한 클라이밍화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TV]◇ 10만원대 개인화부터 연간권까지…기꺼이 지갑 여는 2030
이 같은 즉각적인 성취감을 위해 2030은 기꺼이 주머니를 엽니다. 클라이밍의 하루 이용료는 대체로 2만 원 안팎입니다. 회당 1만 5천~8천 원까지 낮아지는 다회권을 쓰더라도 부담이 결코 적지 않은 편입니다.
이강욱 씨는 클라이밍을 자주 즐기는 만큼 신발을 대여하는 대신 10만 원 후반대의 개인용 클라이밍화를 구매했습니다. 다른 클라이밍장에는 연간 회원권도 끊어뒀습니다. 그럼에도 이 씨는 "취미로는 그렇게 비싸다고 생각은 안 한다"고 말했습니다.
클라이밍을 시작한 지 2년 반가량 된 신요섭(32) 씨는 그동안 클라이밍에 쓴 돈을 어림잡아 300만 원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재미와 운동을 동시에 잡을 수 있어 그렇게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오후 반차를 냈다는 신 씨는 오후 3시부터 암장에 나와 있었고, 저녁 9시가 돼서야 자리를 떴습니다.
클라이밍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사진=연합뉴스TV]◇ "같이 벽을 보고 선 순간, 우린 이미 동료"
클라이밍은 개인 종목이지만, 클라이밍장 특유의 문화는 '혼자이되 함께'인 방식으로 굴러갑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조심스럽게 자세를 조언해주고, 같은 문제를 여러 명이 돌아가며 시도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2년 넘게 암장에서 일해 온 이채영(30) 매니저는 과하지 않게 서로 응원하는 분위기를 다른 운동과의 차별점으로 꼽았습니다. "클라이밍은 떨어진다고 야유하지 않는다. 잘 풀면 응원하지만, 실패했다고 못한다는 반응은 없다"고 이 씨는 전했습니다.
이 씨가 정의한 클라이밍의 문화는 '적당한 거리감'입니다. 이 씨는 "클라이밍은 서로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모르는 사람의 완등에 '나이스!'를 외쳐주는 적당한 거리감의 응원 문화가 발달해 있다"며 "나 자신과도 싸울 수 있고, 동호회나 친구들과 와서도 서로 도움을 주며 즐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운동"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신요섭(32) 씨가 실내 클라이밍장에서 볼더링 문제를 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이름도 몰라도 '나이스'…벽 앞에서 강해지는 '느슨한 연대'
클라이밍에는 약속도, 대화도 필요 없습니다. 같은 벽 앞에서 땀을 흘리는 것만으로 관계가 성립합니다.
직장이나 SNS 같은 밀착형 관계에 지쳐 있던 이들에게, 이곳은 다른 방식의 연결을 보여줍니다. 관계 맺기 자체에 피로를 느껴온 2030세대에게는 일종의 안전지대인 셈입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길리언 샌드스트롬과 엘리자베스 던은 친밀하지 않은 사이에서의 '약한 유대'가 오히려 최소한의 상호작용만으로 소속감과 긍정적 정서를 얻을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관계를 유지할 부담이 없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연결감을 만드는 조건이 되는 셈입니다.
어느덧 저녁 9시 반. 하루치 도전을 마친 이들이 땀에 젖은 손끝을 털어내며 짐을 챙겼습니다. 조금 전까지 서로의 완등에 박수를 보내던 얼굴들은, 특별한 인사도 서운함도 없이 흩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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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승현(sto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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